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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비가 정말 거셌다. 호우주의보가 내려왔던가. 기상캐스터가 걱정스러운 말로 오늘의 날씨를 전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가 어떤 곳은 침수가 우려된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내 고향은 괜찮을까. 한창 수국이 예쁠 계절. 그리고 지금처럼 비가 거세게 내려 곤란하게 될지도 모를 계절. 그런 날에는 사무소나 집, 어쨌건 실내에 있는 게 좋겠지. 아마 어린아이들 중에 누군가는 천둥이나 번개가 무섭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거고, 누군가는 책상 밑으로 더 숨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그런 창밖을 멍하니 보면서 안 그래도 많은 생각을 더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어디에 속하냐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밖에서 걷고 있었으니까. 푸름이 드문드문 포진한 공원. 거기서 세찬 비를 우산으로 막고 있었다. 그래도 신발은 이미 젖어서 눅눅했다. 입고 온 치마 끝도 살짝 젖은 것 같다. 빗소리가 거셌다. 누군가는 이제 물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 거센 빗속에 서 있느냐고. 그 답은,

 

미유쨩. 좋아해.”

…….”

 

여기에 있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사토 신 씨. 나와 같은 사무소 사람이었다. 이 고백을 받고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반짝, 하고 들었다.

 

내가 고백받을 만한 행동을 했던가?’

 

나 같은 게, 나 따위가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은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신 씨가 아니라 나를. 신 씨가 좋아하고 있는 나를. 그게 진짜 나와 일치할까? 신 씨 같은 태양이, 신 씨같이 멋진 사람이 좋아하는 나는 분명 사실과 다른, 단순히 허상일 텐데. 만약 신 씨가 진짜 나를 알고 나서 충격받으면 어쩌지? 나는 나의 깊은 곳을 무언가로 찔린 느낌이었다. 고백이 찌른 것일까, 고백으로 말미암은 어떤 것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걸까. 어쩌면 나는 지금 스스로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유쨩?”

신 씨, 마음은 고맙지만.”

됐어. 거기까지. 장마잖아~”

?”

 

신 씨는 돌연 내 말을 끊더니 장마라고 운을 뗐다. 나는 신 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반문했다. 신 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비 그치면, 비 그치면 답을 알려줘. 그래. 장마가 끝나고. 그때가 좋겠다. 장마인데 눅눅한 이야기까지. 그런 건 스위티~하지 못해!”

 

그리고 신 씨는 비가 세차게 오는데도 그대로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자신의 우산까지 던져두고. 나는 내가 예상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신 씨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았다. 이름도, 하다못해 감탄사조차 내뱉지 못한 채로 나는 뭐라도 얻어맞은 사람처럼 거기에 서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이렇게까지 갈 일이었을까? 나는 신 씨가 버리고 간 우산이 망가지기 전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우산을 버리고 뛰어가는 것도 스위티한 느낌은 아닌데요, 신 씨. 파스텔 옐로빛 장우산. 신 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젖어있던 내 치마 끝은 이미 안 젖은 부분과 색 차이를 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더는 일정도, 약속도 없었다. 따라서 이후로 별다른 목적지는 더이상 정할 필요가 없었다.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째서인지 내 발걸음은 사무소로 돌려졌다. 왜인지 자문(自問)했으나 답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들이 신경 쓰인다고 대충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소에 신 씨는 없었다.

 

 

**

 

 

안녕하세요. 미후네 미유라고 합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에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나오지 않았고그야 당연하겠지만 애들은 크리스마스를 즐길 권리가 있다, 몇몇 사람들만 일정이 있어 나왔다. 나도 당연하게도 일정이 있어 사무소로 출근한 것이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내가 이 사무소에 스카우트되고 아이돌로서 적당히 잘 나가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프로듀서는 크리스마스에도 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새롭게 프로듀싱 하겠다며 데려온 사람이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 어린아이들을 끌고 오다니. 프로듀서 성격이 나쁜 건지, 융통성이 없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 아이들도 별생각이 없었는지 잘 나왔다. 후일담에 따르면, 스카우트는 그 전에 이미 다 했고, 오늘은 스케줄이 있어 나온 것이며, 내가 처음 본 것은아마 대중도 포함해서당연히 지금이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프로듀서는 말해주었다.

미후네 미유라는 사람도, 그러니까 미유쨩도 그랬다. 어느 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다리에서 부러진 구두에 상심하고 있는 미유쨩을 프로듀서가 발견하자마자 그때 스카우트했다고. 전직 회사원이었다고 한다. 회사원이 아이돌? 정말 예측할 수가 없었다. 하긴 당장 지금 사무소에 소속된 아이돌 중에 전직 아나운서도, 전직 경찰관도 있는 마당에 딱히 이상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미유쨩의 첫인상. , 친해지기 어렵겠다. 미유쨩의 성격이 까다롭거나 특이해 보이는 부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유쨩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와 낯 가리는 듯한 언행에서 단박에 티가 났다. 그래도 이 내가 누군가?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스위티 아이돌 슈가 하트! 마침 동갑이라는 말에 마리나루 말고 다른 친구를 사귈 기회라 생각해 먼저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상대 쪽에서 쉽사리 다가올 것 같지 않으니까. 상대가 다가오길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될 거다.

만약, 정말 만약 내가 미유쨩과 친해지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세상 복잡하게 사는 거 딱 질색이고, 내 솔로곡처럼 살고 싶은걸. 그런 내가 최고로 복잡하게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복잡하게 살기 싫은 나이 26세인데도 말이지.

나와 미유쨩은 처음 만난 이후로 같이 스케줄을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유닛곡을 함께 할 일이 있었다. 같이 스케줄을 하는 것보다 유닛곡을 하게 되면 더 많이 만나게 된다. 미유쨩과 함께하는 유닛곡. 소식을 들었을 땐 단순하게 어떠려나~’ 하고 생각했던 거 같다. 실제로 그때 미유쨩은 여전히 소심해서 잘 끼지 못하는 거 같아 보였고. 오지랖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곁에서 치근덕대며 챙겨주려고 했다. 그를 계기로 미유쨩과 친해졌다. 아마 그때부터 나를 좀 더 친근한 어투로 신 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던가. 이후로 카에데쨩, 미즈키 씨, 사나에 씨 등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모두 꽤 친해졌다.

, 술고래특히 카에데쨩과 사나에 씨들과 술을 먹다 보면 당연히 누구 하나는 뻗어야만 끝난다. 보통 둘 이상이 뻗는다. 사실 다 같이 죽는 게 일상다반사지만. 그때 나는 미유쨩의 주사를 알게 됐는데, 세상에, 우는 거지 뭔가. 아무래도 미유쨩 평소의 소심한 성격에 알코올이 가속을 밟은 것 같았다. 뭔가 힘든 일이 많은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술도 약해! 하트 놀랐다고? 내가 보통 미유쨩의 뒷수습을 담당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해보면 집 방향이 같아서 그런 거 같다. 미유쨩은 술자리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자각 없이 마시다가 자주 만취가 되었다. 그럼 거의 100%의 확률로 내가 집까지 데려다준다.

완전히 만취가 된 미유쨩은 울보다. 좋게 말하면 응석받이가 되고, 나쁘게 말하면 수습이 성가시다. 물론 나는 귀여워서 좋아한다. 설마 이때부터 중증? 높은 확률로 미유쨩은 취하면 집에 들어가는 길부터가 걱정이라 항상 집 안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보통 그 김에 나도 미유쨩의 집에서 자고 간다. 다른 게 아니라 미유쨩이 응석을 부리니까. 하트는 어쩔 수 없다고? 그 얼굴과 목소리로 응석 부린다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어쩔 수 없을걸.

보통 그럴 때마다 미유쨩은 내게 가지 말라고 하는데, 이거 진짜 단순한 말이지만 너무 강력하다고. 잘 생각을 해봐? 아니, 하트 이거에 대해 할 말 많으니까. 미유쨩 얼굴에, 술 때문에 붉어진 뺨, 울보가 되어서 내가 그냥 돌아가면 곧 울 것 같은 표정에, 숨결 많은 목소리로 신 씨, 가실 건가요? 가지 말고 저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하는데 그럼 안 가야지, ? 가냐고?? 갈 수 있냐고?! 그래서 자고 간다? 자고 간다고 하면 미유쨩 되게 좋아한다? , 그때 웃는 거 보고 반했다고 해도 될 거 같은데. 물론 그때의 나는 자각 없었고. 그러니까 내가 계속 데려다주고 자고 간 거겠지만. 문제는 사실 여기서부터인데.

그 정도쯤 오면 이미 기억회로는 전부터 끊겨 있어서, 다음날 미유쨩은 자신이 응석 부린 걸 전혀, 단 하나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음 날 일어나면 가장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대충 상황을 추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한지 모르지만나한테 혹시 뭐 했냐고 묻긴 하지만, 내가 그냥 답을 안 했다. 내가 그냥 데려다주고 나도 술에 좀 취한 탓에 피곤해서 멋대로 자고 가는 일이 많을 뿐이라고 하자, “저 때문에 죄송해요.”라고 평소의 미유쨩으로 얘기한다. 솔직히 적응은 좀 어렵지만,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하면 좀 용서될지도

미유쨩은 내가 100%의 확률로 자기를 데려다준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즈음을 기점으로, 내게 친근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바보인 나는 친구가 생겨서 좋아했다는 사실. 왜 바보라고 했냐면 지금은 아니라는 거겠지? 아무튼, 부르는 톤부터 달라졌다는 건 그때도 느꼈다. 지금 돌아보면 미유쨩, 생각보다 지켜보면 친밀도가 겉으로 티 나는구나 싶다.

단둘이서 휴일을 보낼 때도 많았다. 주로 나랑 미유쨩이 번갈아 가면서 권유했다. 카페를 간다거나, 술을 먹거나 그랬다. 미유쨩 예전에 자기가 다녔던 회사 근처의 카페를 훤히 꿰고 있어서어느 정도냐면, 커피 맛 비교와 메뉴에 대한 평까지 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 일대를 돌아다니다 다음에는 내가 찾아오는 식으로 다녔다. 단둘이서 술을 마실 때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왁자지껄한 게 우리가 아니라 주변이라는 사실은 꽤 다른 분위기를 제공했다. 둘 다 적당히 취해서 돌아간다는 점도 달랐고.

물론! 친구끼리도 이럴 수 있다. 나는 친구끼리는 이러면 안 된다! 친구끼리는 이런 거 불가능!’ 같은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알게 모르게 미유쨩에게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간들이 축적되어서 나한테 만큼은 달리 보이는 날도 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늦게 깨달은 거다. 나에게 있어서 아주 값비싼 교훈이다.

내가 확실하게 의심을 하기 시작할 때는 미유쨩의 활동을 찾아보고 있었을 때였다. 미유쨩의 솔로곡과 동물원 테마파크, 새 의상. 나는 그것들을 찾아보다가 문득 이걸 왜 찾아보고 있지?’하고 의문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자문한 거다.

왜 그랬을까? 우린 친구니까? 그래. 친구니까 그럴 수 있다. 다만 그로부터 소망이 생겼다는 건 조금 다른 얘기였다. , 미유쨩의 곁에 조금 더 있다면 이런 모습, 저런 모습들을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미유쨩을 더 알고 싶어, 미유쨩에게 더 다가가고 싶어. 미유쨩의 새로운 모습을 나만 알고 싶어. 미유쨩이 나만을. . 그렇구나. 나 미유쨩을 좋아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

 

 

신 씨. 사무소에 와서 가장 먼저 말을 걸어 준 사람이었다. 신 씨의 첫인상은 밝은 사람이었다. 내게 자신을 슈가 하트라고 불러달라 했는데 어째선지 나는 신 씨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신 씨도 별말은 없었다. 신 씨는 자신의 말버릇인 스위티란 말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패션 타입으로 배정받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든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친다고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던 거 같다. 후에 알게 된 사나에 씨도 그랬으니. 키라리쨩이나 마리나 씨 같은 경우도 그렇고.

신 씨는 정말 상냥한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이벤트 할 때나, 유닛곡을 하게 됐을 때나, 누구에게나. 그래. 누구에게나. 함께 유닛곡을 준비할 때, 신 씨가 정말 잘 챙겨줘서 좋은 사람인 줄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휴일 때 신 씨와 같이 카페를 가거나, 단둘이 술을 마시거나, 집까지 항상 데려다준다거나. 항상 신 씨가 먼저 권유해줘서 나도 마음이 점점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내 쪽에서 신 씨에게 먼저 권유하는 일도 늘었다. 나에게 있어선 한 걸음이었다.

그로부터 신 씨와 더욱 친하게 되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 신 씨는 태양이구나. 아이돌로서도, 사람으로서도. 평등하게 빛을 비추는 태양. 에너지를 모두에게 주는 사람. 그 빛에 때로는 다들 눈살을 찌푸릴지언정 싫어하진 않는다. 오히려 결국엔 다들 태양을 보고 웃게 된다. 그런 사람이다, 신 씨는. 수많은 존재 중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나도 그 햇빛의 수혜자다.

단둘이 있을 때도 신 씨는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언제나 밝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긴 태양이니까 그렇겠지만. 신 씨의 무척이나 따스한 눈빛과 분위기는 마치 나만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달콤했다.

그렇지만 너무 다정한걸요, 당신은. 언제나 집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보다 더 거리가 먼 절 데려다주고. 휴일 때면 늘 저를 불러주고. 언제나 사무소에 오면 제일 먼저 저를 찾고, 찾는다고 하고. 그렇게까지 제게 다정할 필요 없잖아요. 분명 태양은 평등하게 빛을 내리쬐고 있을 터인데. 바보 같은 인간인 저는 그걸 보고 착각해버리잖아요. 나만을 향한 거라고 착각하게 되잖아요.

결국 난 이카로스처럼 착각하고 말겠지. 오만하게 나는 태양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할 거야. 어리석게도 태양을 가질 수 있다고, 독점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너무 큰 바람이라고 스스로 선을 그었다. 내가 태양에 닿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리고,

 

미유쨩. 좋아해.”

 

장마였다.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이번 장마는 아주 길 거라고 뉴스에서 들었다. 장마 초기부터 이렇게 쏟아지는데 어떻게 길고 길 장마를 지내려나 혼자 내심 걱정했다. 그래도 고향의 수국들은 지금 절호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어 우산에서 총을 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파스텔 옐로빛 장우산이 옆에서 밝게 걸어가고 있었고, 고백 같은 말은 흘러가듯 나왔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어쩌다? ? 왜 신 씨가?

내가 고백받을 만한 뭔가를 했던가? 돌이켜봐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분명 신 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함에도,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서웠다. 뭔가 다르다고,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나는 애써 분명 그냥 친구로서 그런 거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뭘까. 그냥 이 틈을 타 신 씨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그러다 결과가 잘못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몸까지 멈춰 세웠다. 나는 걷다 우뚝 서버렸다. 나의 상황을 알려주듯 우산에서 빗방울이 관성을 받아 움직였다. 신 씨가 뒤이어 멈추고 나를 보았다. 의아함과 동시에 대답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미유쨩?”

 

도망쳐야 해. 나는 할 수 없어. 아니야.

 

신 씨, 마음은 고맙지만.”

됐어. 거기까지. 장마잖아~”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사무소에 와도 신 씨는 없었다. 집으로 간 걸까. 사무소에는 의외로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나오지 않았거나, 일찍 돌아간 것 같다. 애초에 신 씨가 그대로 도망쳐서 사무소로 갔을 리가 없겠지. 나는 사무소에 온 김에 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하기로. 사무소에 두고 갔던 트레이닝복이 다행스럽게 생각됐다. 젖어버린 옷과 신발은 한편에 두고 나는 창문을 세차게 때리는 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망쳐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왜? 너무 큰 바람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덜컥 들어서? 그건 너무 김칫국 아닌가? 아니면 나는 그저 두려움 앞에 도망치기를 좋아하는 겁쟁이인가? 아니면, 태양이 나만을 비출 수 있다는 기쁜 사실을 어떤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일까?

더하여, 나는 왜 선을 그어야만 했었나. 어디서부터 신 씨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버린 것인가?

태양 같기에 좋아했다고 하기엔 너무 간단한 답이었다. 태양 같다고 생각하기 이전부터 내 시선은 신 씨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이전부터, 무언가 계기가 될 법한 사건 같은 게.

. 생각났다. 언젠가 내가 술에 만취했을 때였다. 늘 다음 아침까지 끊겨 있던 기억이 그때는 전철에서 내릴 때부터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취기는 여전해서, 머릿속에서 기억이 저장되고 있다는 것 말고는 별 차이는 없었다. 즉 다른 사람이 봤을 땐 그 차이가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에 취해 급하게 술을 마신 만큼 급하게 취기가 빠져나가는 것일까. 누구인가 나를 부축하고 가자고 말하고 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신 씨인 걸 알았다. “신 씨.” 하고 최선을 다해 불러 보았지만, 취해서 부르는 건 줄 알고 금방 도착하니까.”라고 신 씨는 대답해주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를 침대에 눕히며 화장만 지우고 얼른 자. 내일 연락할게.”라고 하며 신 씨가 가려고 했다. 가지 말아줘. 어리광이 주체 못 하고 흘러넘친다. 술을 먹으면 이성이 제대로 날 붙잡아주지 못하니까. 나는 급하게 신 씨의 손목을 잡았다. 나보다 조금 서늘해 시원한 손목. 그 냉기가 더 날카롭게 다가와서. 나는 신 씨, 갈 건가요? 가지말아주시면 안 될까요? 저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라고 떼를 써버렸다. 신 씨는 그런 나를 어떻게 보았더라. 그것만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서. 하지만 그 순간의 대화만은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그래서 매우 맴돌아버려서.

 

그래. 어쩔 수 없네. 알았어.”

고마워요. 역시, 신 씨예요.”

이렇게 어리광쟁이 울보 미유쨩, 하트 아니면 어떻게 할 수도 없겠어?”

싫어요? 환멸 나요?”

 

신 씨는 그런 내 물음에 나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그 어떤 스위티한 웃음보다 가장 스위티했다. 신 씨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오히려 좋은걸. 이런 미유쨩, 이 하트가 평생 책임져줄게.”

 

그 고백 같은, 더 나아가 프러포즈 같았던 말은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았다. 누구에게나 이런 말을 한다면 신 씨는 죄질이 나쁜 착한 사람이고, 나한테만 이런다면 그것은 타 죽을 만큼의 빛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햇빛을 조금만이라도 차단하면 뭔가 괜찮아질 거 같아서. 하지만 머릿속에는 그 빛을 받았던 순간이 계속 떠올랐다. 옆에서 신 씨가 자고 있었다. 나는 신 씨의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에 따라 울리는 그의 고동 소리가 안정되어서. 그리고 그와 반대로 내 심장 소리는 주체못하고 뛸 것 같아서. 나는 애써 소리를 맞춰보려고 했다. 그러면 리듬이 맞으니까 내 마음을 조금은 숨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바람과는 다르게 포개어 본 호흡에는 소망만 가득 차게 되어버린다. 내가 1순위로 당신을 우선할 권리를 갖고 싶다고. 더 많은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 더는 안 돼. 자야 해. 술도 점점 깨는데. 이런 상태로 계속 깨어 있다간 다음날 돌이킬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태양에 빠져 타 죽는다. 빛에 눈 부셔 죽고 만 셈이다.

타 죽은 나는 어디서부터인가 겁이 났다. 밝고 달콤한 신 씨가, 모두의 스위티 슈가 하트모두의아이돌 아닌가? 그런 아이돌을 내가 정녕 좋아해도 되는 건가? 불안했다. 색으로 따지자면 양의 영역이자 밝은 황색의 신 씨와 음의 영역이자 어두운 청색인 나는 어울릴까? 사람들에게는? 앞으로는? 너무나도 겁나는 게 많았다. 나를 덜컥 불안하게 하는 것은 수도 없이 넘쳐났다. 불안이라는 바다에 익사 당할 것만 같았다.

나는 안 될 거야. 나는 가능할 리가 없어. 그런 건 가능한 사람이 따로 있어. 그게 나는 아닌 거야. 애초에 그런 거, 그냥 지나가는 말일 뿐인걸. 그거에 무겁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될 리가 없어.

그럼 반대로 자문(自問)한다. 그럼 왜 나는 안 되는 건가? 이렇고 저렇고 수많은 이유가 정말 신 씨에게 닿을 수 없는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이유가 되나? 자문자답은 끝도 없었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무엇에 불안해하고, 무엇을 겁내고, 무엇을 전제로 두고 이렇게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회피하고 있는 걸까.

계속 자문해도 나로서는 무서워 쉬이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나는 선을 너무나도 일찍 그을 줄 알게 되었다. 그런 것을 모르거나 그런 것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일찍이 생각했다. 누군가와 쉽게 친해지는 활발한 사람은 다 따로 있는 거라고. 그런 종류의 사람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일찍이 그것부터 선을 그어버렸다. 그래서 나의 소심함과 내성적인 면을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과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어떻게 해도 별수가 없는 거라고. 그렇게 안주(安住)할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던 걸지도.

무엇보다도 사랑이란 거 너무 부질없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 나 자신에게 자괴감과 환멸감이 들었다.

사랑이야 원래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크다지만, 나는 유독 더 그랬던 거 같다. 팔자가 나빴나? 몇 명의 전애인들 때문에 안 그래도 내성적인 성격은 더 바닥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학습을 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과 신 씨는 확연히 다르니까 이번에는 기대감을 품고 만 것인가? 끝없이 질문을 하고 끝없이 해답을 찾아 나가려 하면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단순하게 살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괜찮은 사람이었을까. 이제야 고민한들 무슨 소용일까.

장마는 정말로 길게 지속될 것 같았다.

 

 

**

 

 

미유쨩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나니, 스스로 한계선을 정해놓고도 아슬아슬했다. 술김에 미유쨩에게 몇 번을 고백했던가. 늘 내가 데려다줄 정도로 취한 미유쨩의 기억은 다음 날 완전히 날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만족에 기인한 공허한 고백은 몇 번이고 더 있었다. 그럴 때마다 미유쨩은 그게 진심인 걸 알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나도 취기에 고백한 거라 치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신이 취해 있기에 무엇인지 모르는지이쪽이 제일 유력하지만늘 헤실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언젠가 내가 평생 미유쨩을 책임져주겠다는 말도 했다. 나는 장난스레 말했지만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내가 미유쨩에게 하는 말은 그 어떤 말도 한 줌 거짓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진심이야, 미유쨩.

이런 미유쨩, 나만 알고 싶은걸. 나만 좀 더 그런 너를 보고 싶은걸. 나는 어떤 미유쨩이라도 좋아. 그러니까 울보에 어리광쟁이 미유쨩도, 그래서 이렇게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미유쨩도 나 말고는 몰랐으면 좋겠어.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널 어떻게 할 수 없었으면, 하고 바라고 말아. 있지, 미유쨩. 만약 정말로 어디도 네가 갈 곳이 없다면 내게 와. 나는 정말로 평생 책임져 줄 테니까.

옆에서 자는 미유쨩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고 어떻게든 잠들려고 노력했다. 만약 옆으로 돌아 미유쨩의 얼굴을 본다면 그날로 나는 잠은 다 잔 걸 테니까. 날뛰려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얼른 잠들길 기도했다. 시간이 약간 흘러 호흡도 미유쨩과 포개어질 때 즈음 나는 겨우 잠들었다.

 

하트. 미유 좋아하지.”

?”

 

어느 날, 루미쨩이 술자리에서 물었다. 미유쨩은 이날 로케를 가는 바람에 불참솔직히 그래서 조금 슬펐단 건 비밀. 마리나루도 듣고 반색을 띠며 루미쨩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 하트. 그거 티 나.”

?? , 진짜?”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하네.”

 

티가 났다고? 어디서? 그렇다면 미유쨩도 알고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미유쨩한테도 티 났을까?”

그건 아닐걸. 미유쨩 생각도 못 할 거야.”

, 그건 조금 슬플지도.”

 

아무렇지 않게 마리나루의 말을 받아 쳐냈지만, 나는 속으로 내심 안도했다. 미유쨩만 모르면 돼. 다 티 나도 당사자만 모르면 되는 일 아니야? 물론 좀 위험인물들립스 쪽 누군가라던가, 니나쨩이라던가…―에게도 티가 안 나면 그걸로 만족.

 

어쩌다 반한 거래.”

, 술자리 주제 하트 연애 이야기? 안 돼, 안 돼. 그건 일급 비밀이라구.”

 

어쩌다 반한 건지, 그런 거 당장 나 자신도 잘 모르겠는걸. 나도 이미 늦을 대로 늦은 다음에야 알았으니까. 그 계기는 있지만, 그건 차마 남들에게 설명하기 부끄럽고. 그것보다,

 

정말 그렇게 티가 나?”

, 아마 주변 사람들은 다 알지 않을까. 사나에 씨는 알던데. 미즈키 씨도 알걸.”

, 어디서 티가 나는 건데?”

하트. 모르나 본데, 너 미유 볼 때 눈빛을 알고 하는 말이야?”

평소와 같지 않아?”

아니.”

 

마리나루와 루미쨩은 내가 미유쨩을 보는 눈빛부터 다르다고 말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숨길 수가 없나 보다. 나는 평소대로 본다고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아니라는 거잖아. 예로부터 어른들이 눈은 마음을 보여주는 창이라고 했다. 이미 미유쨩을 향한 내 마음은 여과 없이 보이고 있던 셈이었다. 그런데 당사자인 미유쨩은 모른다고? 그건 그것대로 문젠데? 당사자는 몰라줘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한 편으로는 이렇게 주변이 알 정도면 미유쨩도 알 법한데. 둔한 건가. 설마 아예 논외?

 

미유, 귀엽지. 하트 그런 취향이었구나.”

, 아니. 잠시만. 귀여운 건 맞는데~”

맞잖아? 사나에 씨는 체포할 타이밍만 재고 있대. 소문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걸.”

 

오늘따라 주변의 평을 듣게 되어서 그런가, 머릿속이 혼잡했다. 겉모습은 평소의 스위티 슈가 하트로 있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달콤하고 합법이 지나친 약들이 아니라 조금 쓴 처방 약으로 혼잡하고 복잡했다. 심지어 사나에 씨는 날 체포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니. 적은 가까운 데 있었어. 나 당분간은 조심해야겠는걸?

 

그러고 보니 미유랑 예전에 면세점 광고를 찍은 날이 있었는데.”

갑자기?”

좋잖아? 너 그거 못 들은 얘기일 테니까.”

 

갑자기 루미쨩이 나는 몰랐던 미유쨩의 스케줄이나 휴일 얘기를 해줬다. 면세점 광고를 찍은 날 일본주를 사 갔다던가어라? 근데 미유쨩 일본주 좋아했던가?, 애들이랑 작물 재배 숙제를 도와주면서 놀았다던가이건 루미쨩이 호타루쨩과 이야기하다가 들은 얘기, 카코쨩과 모노폴리하다가 참패를 당했다던가이건 데레포에서 얼핏 봤던 거 같은데. 마리나루도 이런저런 거 얘기해주면서 몇 개는 데레포에도 올렸는데 못 봤어?” 하고 물었다. 나는 하트, 데레포 밀리면 일일이 보기 힘들어~ 무엇보다 미유쨩 데레포 잘 안 해!”라고 맞받아쳤다. 그나저나 미유쨩 요즘 다양한 사람들하고 지내는구나. 예전에는 낯 가려서 몇몇하고만 지내지 않았나. 분명 미유쨩에게 좋은 현상임에도 뭔가 가슴 속이 아려왔다. 나는 애꿎은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 이후로 기억은 끊겼다.

다음날, 핸드폰을 보니 미유쨩의 연락이 와 있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다 들었어요. 집에 조심히 들어가셨길 바라요.’

 

? 미유쨩이 어떻게 내가 술 마신 걸 알지? 일단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모티콘을 보내고 재빨리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봤다. 같이 있었던 루미쨩에게 연락해봤더니,

 

하트, 기억 안 나는구나. 너 취해서 텐션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선 미유쨩한테 전화하려고 했어. 새벽에.”

? 잠시만.”

 

나는 듣자마자 연락처 최근 기록을 봤다. ‘미유쨩.’ 나는 보자마자 기겁을 하면서 루미쨩에게 싫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떡해. 미유쨩 그래서 받았어?”

아니, 우리가 말리긴 했는데. 이미 신호가 갔다가 끊긴 거라. 그래서 미유쨩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을 땐 마리나가 어떻게든 해결했어.”

, 하트 일생일대의 실수~ 하고 넘기기엔 너무 잔인하잖아. , 하트 끝났어.”

미유쨩은 별말 없었어?”

많이 마신 거 같다고 집에 조심히 들어갔길 바란대. 이런 천사가 또 어딨어.”

아무렴.”

 

세상에, 하마터면 추태를이미 추태를 약간 부리긴 했지만부릴 뻔했잖아. 다행이다. 그런데 나 어쩌다 그렇게 많이 마셨더라. 어제 미유쨩 좋아하는 거 들켰고, 나는 모르는 미유쨩을.

. 여기서였구나. 이번엔 부끄러워서 앓는 소리가 났다. 나 지금 유치하게 질투한 거야? 질투해서 술을 그렇게 마신 거라고?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미유쨩한테 전화할 뻔하고? 잃어버린 기억들이 디스크 조각 모음처럼 모이자, 나는 정신에 꽤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미유쨩은 천사다. 모두에게 다정함을 베풀며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모두를 보듬어주는 천사. 낯 가리고 내성적이어도 성품 자체는 올곧아서 모두에게 잘 대해준다. 다정하고 차분하다 보니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모두가 좋아한다. 어린아이들도 잘 따른다.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도 좋아한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두를 따스하게 만드는 사람. 자신은 희생까지 감내할 정신으로 모두를 위해 힘내는 사람. 아이돌로서도, 사람으로서도 미유쨩은 천사가 틀림없었다. 정돈된 언어와 행동, 자애로움으로 모두를 이끄는 사람. 미유쨩은 인간계로 내려온 천사가 분명했다.

천사를 사랑한 나. 만약 미유쨩이 내 전화를 받았다면 나는 뭐라고 했을까? 아주 유치한 질투를 표현했을까? 텐션이 높은 채로? ‘미유쨩, 하트 오늘은 데려다줄 사람이 없어서 조금 슬프달까.’라던지, ‘미유쨩, 왜 이런 거 저런 것 하는 거야? 하트 질투 날지도.’라던가. . 생각하니 조금 아찔한걸. 루미쨩이 말려줘서 다행일지도.

그렇지만, 정말 애 같을지도 모르겠지만 질투 났는걸. 미유쨩 술도 약하면서 일본주는 왜 샀대? 미유쨩 사실 일본주 쪽이었나? 아닐 텐데? 맨날 맥주나 과일주 마셨으면서심지어 술도 약해서 이걸로도 마시다 보면 만취하면서! 그럼 누구한테 일본주 선물하려고 했나? 그러고 보니 일본주는 카에데쨩이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어라? 이렇게 웃기는 결론 도출? 나 너무 나머지 나가는 거 아니냐. 그냥 소장이나 전시용일 수도 있는데 그걸 바로 다른 사람으로 연결하다니, 이 정도면 말기라구.

게다가 게임이라니. 나도 게임 좋아하는데. 보드게임 같은 거 좋아한다고? , 정말! 완전 심각. 하나하나 질투해서 뭐 어쩔 거야. 이거 답이 없다고. 적당히, 적당히! 이러다간 숨길 수도 없게 된다고.

미유쨩이 로케에서 돌아오는 날, 나는 무턱대고 마중을 가겠다고 했다. 미유쨩이 장기간의 스케줄에서 돌아온 후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나였으면 해서. 터무니없을 법하게 들릴 말도 미유쨩은 좋아했다. 데리러 가면서 나는 몰랐던 미유쨩의 CF나 스케줄을 검색해서 찾아보았다. 밀린 미유쨩의 데레포도 검색해서 다 찾아봤고. 바로 즐겨찾기를 눌렀다. 미유쨩의 면세점 광고는 정말 예뻤다. 예전에 회사원 시절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고. 데레포에 올라온 사진을 캡처하며 가니 금방이었다.

시간은 저녁을 넘어 밤이었다. 집으로부터 거리가 꽤 되었던 곳이었다. 개찰구에서 미유쨩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을 기다렸을까, 조금 멀리서 미유쨩이 오는 게 보였다. 내가 손을 흔들었다. 미유쨩은 그걸 보고 바삐 달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미유쨩의 캐리어를 잡았다.

 

고생했어. 잘 다녀왔어?”

. 마중 나와주신다고 해서 감사해요. 신 씨도 피곤하실 텐데.”

괜찮아~ 이대로 바로 집 갈 거지?”

, . 신 씨, 괜찮으시면 저의 집에서마시다 갈래요? 답례로 오늘 사 온 술 같이 마셔요.”

, 좋아!”

 

뜻밖의 이벤트? 무슨 술을 사 왔을까. 오랜만에 둘이서 마시는 건가~ 그런 생각들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미유쨩에게 로케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미유쨩은 이런저런 일들을 말해주었다. 대기실에서 있었던 일들이나, 공연하면서 있었던 일 등을 말해주었다. 전철에는 주말 직전의 막차라 사람들이 꽤 있었다. 출퇴근보다는 사람이 적었지만, 술 먹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미유쨩이랑 타고 가야 하는 전철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드나드는 전철이었다. 괜찮으려나.

역시나. 미유쨩 전철에 사람 많으면 휩쓸리는 일이 많아서 곤란해하고 있었다. 나는 미유쨩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미유쨩의 손목은 곧 부서질 듯 얇았고, 온기를 품어 부드러웠다. 여름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 체온과 함께 계절의 열기가 스며있었다. 살짝 힘을 줘 당기자 사람들을 뚫고 미유쨩이 내 앞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괜찮아? 또 휩쓸릴 뻔한 거지.”

. 사람이 많으면 좀 힘드네요. 감사합니다. 그 신 씨.”

? ?”

이제 손 놓으셔도 돼요. 신 씨 캐리어도 들어주시는데 손잡이 잡으세요.”

? , 미안.”

 

나는 재빨리 미유쨩의 손을 놓고 손잡이를 잡았다. 아직도 내 손에는 미유쨩의 체온과 열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맞닿은 체온이 순간이 아니라 영원으로 새겨진 것만 같았다. 자리가 나서 바로 미유쨩을 앉혔다. 내가 미유쨩 앞에 서서 가림막이 되는 게 나았다. 그야 미유쨩 의외로 시선 많이 받는걸. 어떤 의미로든 짜증 나. 그래서 내가 앞에서 가림막처럼 서 있으면 생각보다 괜찮았다. 내가 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미유쨩은 전철에서 암묵적인 시선을 많이 받는다. 예전에도 이랬을까. 그때는 어땠을까. 갑자기 싫은 기분이 들었다. 손잡이의 온기에 집중했다. 손잡이는 여전히 따뜻하다. 분명 전철의 에어컨은 꽤 강하게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도.

미유쨩의 집에 둘 다 맨정신으로 오는 건 처음이었던가. 내가 캐리어를 옮겨 놓고, 미유쨩은 바로 술과 잔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내가 미유쨩에게 피곤할 텐데 괜찮냐고 형식적으로 물었더니, “저는 괜찮아요. 이 술 어떨지 궁금했는데 신 씨와 같이 마실 수 있어서 그게 더 좋아요.”라고 미유쨩의 답이 돌아왔다.

미유쨩이 사 온 술은 정말 맛있었다. 기대한 만큼의 맛을 충족시켜줬다. 하지만 도수가 좀 있었던 것 같아 금방 취기가 올라왔다. 이거 의외로 강한 녀석이었나? 병을 돌려서 보니 꽤 도수가 높았다. 잠시만. 그럼 미유쨩 금방 취하는 거 아냐? 걱정되었지만 집이니까 상관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사람은 취기가 올라오면 솔직해진다. 나는 텐션이 지나칠 정도로 높은 채로 솔직해지고, 미유쨩은 사람이 달라질 만큼으로 솔직해진다. 나는 그래서 전에 생각한 것을 물었다.

 

미유쨩. 집 안의 향기가 되게 좋다. 어떻게 하는 거야? 매일 향초라도 피우는 거?”

, 종종 인센스 스틱을 써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요? 지금도 나요?”

그렇구나. , 지금도 약간 남아 있어. 배었나 봐. 되게 좋다. 미유쨩의 냄새가 나.”

저 이런 향이 나던가요?”

. 좋은 향이 나. 항상.”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유쨩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유쨩은 잠시간 우물쭈물하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 씨는 태양의 향이 나요.”

태양?”

 

. 그 태양의 안정감 있는 향이 나요. 그리운 냄새예요. 제가 좋아하는 향이기도 하고요.”

내가 태양? 천사가 나를 태양이라고 칭했다. 그 사실에 기뻐서 헤실거리며 웃었다. “하트, 기분 좋을지도.”라고 하며 괜히 머쓱한 척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기억이 끊겼다.

 

 

**

 

 

눈을 뜨니 익숙한 천장이었다. 그러나 내 집의 천장은 아니었고. 미유쨩의 집. 어제 헤실거리며 웃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별짓은 안 했겠지. 옆을 슬쩍 보니 미유쨩이 잘 자고 있다. , 역시 아침에 봐도 예쁜 거 같아. 아니다. 아침이라서 더 예쁠지도. 이미 중증을 넘어선 말기가 아닐까? 확실하게 미유쨩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다음엔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져버린 것 같아. 나 정말 미유쨩을 사랑하게 된 걸까? 아침 햇살에 빛나는 머리칼, 감고 있는 눈을 따라 내려오는 이목구비 선. 모든 게 더욱더 좋아져. 나는 눈을 다시 감았다. 미유쨩의 향이 더 깊게 느껴진다. 다시 떴을 땐 미유쨩과 눈을 마주쳤다. 나는 순간 놀라서 숨을 삼켰다. 미유쨩은 나를 멍하니 보다가 잠긴 목소리로 잘 잤냐고 묻는다. 잠에 덜 깨서 그런 것 같았다. 나도 고개를 살짝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기억이 끊겨 내가 혹시나 뭔가 했을까 싶어 미유쨩에게 물었지만, “그대로 쭉 텐션 유지하다가 잠드셨어요.”라고 짧게 말했다. 정말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으니 나는 믿는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내가 그랬는지 의심되었다. 내가 텐션이 높아지면서 혹여나 사고라도 치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만약 고백이라도 했으면? 아니면 그 이외의 뭔가를 했다면? 꼭 할 거란 보장은 없지만, 꼭 못할 거란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미유쨩이 얘기하지 않으니 별수가 없었다. 그날 아침 미유쨩이 만들어 준 밥은 맛있었다.

며칠이 더 흘러 장마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하루하루가 매우 습해지고 하늘은 우중충해졌다. 그리고 후두둑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나는 미유쨩과 밖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비가 쏟아졌다. 내 노란색 장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흡사 총 쏘는 소리 같았다. 미유쨩도 그렇게 생각할까. 신경 써서 산 장밋빛 레인부츠는 오늘 날씨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는 이제 싫어질지도 모른다. 비에 만약 자백제 성분이 있다면 나는 비를 싫어할 거다. 어쩌다 미유쨩에게 고백했지? 고백하고자 마음을 먹고 계획하며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냥 흘러가다가 나온 말이었다. 무엇을 얘기하다가, 어떤 주제에서 여기까지 왔는지, 고백하자마자 그것은 싹 잊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너무 좋아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새어 나온 거라 생각했다. 나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소망을 말해버린 셈이었다. , 나 이제 끝났구나. 끝났어.

 

미유쨩. 좋아해.”

 

그걸 입 밖으로 발화하는 순간, 나는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미유쨩에게 가능성을 건 것은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까웠다. 나 도대체 무슨 자신감? 그렇지만 달콤한 것에는 누구나 약한걸? 이게 달콤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 자신. 혼자 머릿속에서 자문자답하며 묵묵히 걷고 있는데 미유쨩이 멈춰 섰다. 갑자기 우뚝 멈춰선 미유쨩. 미유쨩의 민트빛 우산에서는 관성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나는 미유쨩을 불렀다. 그리고 미유쨩의 입에서는,

 

신 씨, 마음은 고맙지만.”

 

그만. 나는 미유쨩의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이건 명백히 거절의 말 아닌가. 지금에서는 그 대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에게 최소한의 기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이미 답은 정해졌다면 나 자신에게 그 답을 수긍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나는 되지도 않는 말과 함께 연기(延期)를 요구하며 우산도 버리고 냅다 뛰었다. 일단 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거 당장은 마음 아프다고. 비가 세찼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찬 것보다 온몸이 젖은 게 더 빨랐다. 나는 집으로 냅다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미유쨩이 거절의 의사를 표하고자 했다. 그것을 어떻게든 미루고자 한 것은 내가 잠깐의 생각을 하며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 스스로 인정할 시간을 줘야 했다. 하지만 달리고 나니 한 편으로는 웃기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고맙다고 했으니까 완전히 싫은 건 아니잖아? 그럼 내가 지금부터라도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완전 간단하네? 설마 미유쨩 남자만 좋아하는 건가? 항간에는 남자만 좋아하는 이른바 헤녀는 꼬실 수 없다고 하던데. 아냐. 할 수 있어. 나는 모든 인류에게 하트 빔을 쏘기 위해 노력할 만큼의 능력자잖아?

비는 싫다. 자백제 성분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사람을 근거 없는 자신감에 젖게 만드니까. 비에 걱정이 씻겨 내려가니까. 사람이 너무나 무모해지니까. 그래서 나는 우는 대신 결심한다.

미유쨩이 나한테 반하게 만들겠노라고. , 미유쨩. 여길 봐! 내가 널 사랑하게 해줘. 달콤하게 해 줄 테니까! 미유쨩의 세계를 조이풀하고 피스풀하고 유스풀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세계로 만들어줄게. 달콤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스위티스트 월드를 널 위해 줄게!

 

 

*

 

 

미유쨩 로케 간 동안 난 되게 논 스위티했다구?”

 

로케를 다녀온 뒤, 신 씨와 술을 마신 날. 이날 신 씨는 먼저 내게 마중을 오겠다고 라인을 남겼다. 나는 호의에 감사해 그 제안을 승낙했다. 꽤 먼 거리인데도 신 씨는 나를 마중하러 직접 와주셨다. 내 캐리어까지 선뜻 먼저 들어주고. 솔직히 로케 끝내고 돌아가는 길은 지치기 마련인데 옆에 태양이 서 있으니 갑자기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역에는 출퇴근 시간이 아니었지만 주말 막차라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만원 전철에 곧잘 휩쓸리곤 했던 나는 이번에도 역시 휩쓸려 타지 못할까 봐 내심 걱정되었다. 그때 내 손목에 따뜻한 손이 잡혔다. 나를 잡은 손의 온기는 계절의 열기보다 훨씬 더 따뜻했다. 그 손은 약간의 힘으로 날 당겼다. 그 온기가 좋았다.

나는 신 씨에게 선물해주려 했던 술을 같이 먹자고 권유해봤다. 나도 계절의 열기에 떠밀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떠한 마음에 의한 용기일지도 모르고. 신 씨는 좋다고 해줬다. 술은 맛있었다. 그런데 신 씨를 고려한 술이라 도수가 약간 높았다. 나라면 금방 취할 것 같았다. 적당히 조절하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만취할 테지. 속도를 조절하며 마시니 딱 알맞은 속도로 취하기 시작했다.

신 씨도 어느 정도 마시니 취하셨는지 텐션이 슬슬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 씨는 갑자기 언제나 집 안의 향기가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취미 삼아 하는 아로마 테라피나 인센스 스틱을 자주 피우는 게 원인이지 않을까 답했다. 지금도 나나? 언제나 있는 쪽인 나로서는 그렇게까지 향이 잘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신 씨는 느껴진다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유쨩의 향기가 나.”

 

그 말에 내 귀가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감사하다고 작게 말하며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 이건 신 씨가 먼저 말했고, 취했고 그런 거니까. 별로 이상한 말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니까.

 

신 씨는 태양의 향이 나요.”

태양?”

. 그 태양의 안정감 있는 향이 나요. 그리운 냄새예요. 제가 좋아하는 향이기도 하고요.”

 

태양의 그 따스하고 마음을 채우는 향. 향수를 그런 향으로 뿌리는 것일까, 아니면 신 씨 본연의 향이 그런 것일까. 만약 향수여도 하고 많은 향수 중에서도 그 향을 택한 거 자체부터 신 씨다웠다. 햇빛을 향으로 만든다면 느껴지는 향. 신 씨의 곁에서는 늘 그런 포근한 향이 난다. 그래서 신 씨 곁에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안정된다. 예전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던 아이와도 비슷한 향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향이었다. 신 씨의 머리칼이 햇빛을 받은 듯 예쁜 금발인 것도 그렇고, 같이 있으면 어쩐지 안심되는 것까지.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서 생겼던 걸까? 알 길은 없겠지만. 사실 뭐가 됐든 언제나 술에 취하면 신 씨가 데려다주는 점도, 그 누군가가 신 씨라는 점도 분명히 좋았다. 그리운 무언가가 자꾸만 떠올라서.

신 씨는 급하게 마셨던 건지확실히 술은 신 씨의 취향에 딱 맞을 법한 맛이었다취해서 텐션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신 씨는 그 상태로 이런저런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생각 외의 말들이었다.

 

미유쨩. 면세점 광고 찍고 일본주 사 갔다며?”

, . 카에데 씨에게 선물하려고.”

왜 나는 없는데~?”

지금 마시고 있잖아요.”

, 그렇지만~”

 

텐션이 높아진 채로 묻는 말이지만 이건 응석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갑자기 신 씨에게서 나온 말은 생각 외였다. 나도 어느 정도 취한 상태라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생각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한순간 든 생각은,

 

이거 질투인가?’

 

신 씨가 질투를? 나는 ?’ 하고 의문이 들기 이전에 좋은 기분이 먼저 들었다. 확실히 나도 취했다. 신 씨는 그 뒤로 말을 또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카에데쨩한테는 저~번에 줬으면서 하트한테는 이제 주는 거야.”

그때 신 씨 마음에 들 법한 술은 없었어요. 그리고 신 씨랑은 둘이서 마시니까 어떻게 보면 더 잘 된 거 아닐까요?”

 

신 씨는 그걸 듣고 그런가하고 생각하더니 방긋 웃었다. “그게 더 스위티하지.”라는 말과 함께. 이후로도 자기도 보드게임을 좋아한다던가데레포 얘기인 거 같았다하는 말들을 계속했다. 나는 일일이 다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신 씨 텐션이 높아짐과 동시에, 과도하게 솔직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아니라 신 씨가 다음날 기억이 끊길 것 같았다. 그렇게 조금 더 질투 비슷한 불만을 쏟아내고서야 신 씨는 사 온 술을 다 마셨다. 더는 마시게 하면 안 될 거 같아질투하시는 모습을 더 보고 싶긴 했지만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신 씨는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급작스레 아니면 도와줄게!”라는 신 씨의 말에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왠지 그 상태로 뭔가를 하셨다간 사고를 칠 거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란 건역시 마음속 비밀로 남겨둬야겠지?

정리를 다 끝내니 신 씨는 엎드려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맨날 내가 먼저 만취해서 뻗었기에 신 씨가 만취한 모습을 보는 건 진귀한 풍경이었다. 사진 찍어둘까. 몰래 찍는다고 찍어도 사진 찍을 때 나는 셔터 소리에 신 씨는 부스스 깼다. 그러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일단 신 씨를 침대에서 재우는 게 좋겠지. 신 씨는 그래도 자기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는지, 내가 부탁하면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신 씨는 준비를 끝내고 침대로 올라가서는 그대로 누우면 되는데 눕지는 않고 나를 멀뚱히 봤다.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면서 신 씨의 말을 기다리자,

 

미유쨩은 안 들어와? 나 미유쨩이 옆에 없으면 안 잘 건데.”

. , , 금방 양치하고 올 테니까요.”

 

어쩜 말에 쿠션 하나 없을 수가. 나는 순간 두근거려서 화장실로 냅다 도망쳤다. 양치하면서 술이 좀 깨면 나을까 싶었지만, 양치 같은 걸로 술이 쉽사리 깨면 이전에 신 씨에게 신세를 자주 질 리도 없었겠지. 신 씨는 어쩌고 있나 보러 가니, 신 씨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싸우고 있었다. 신 씨는 텐션이 높은 채로 , 이거 안 풀리네. 정말 이러기 있기냐~”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신 씨의 머리를 풀어주었다. 안 그러면 신 씨는 곧 자기 머리카락일지라도 잡아 뜯을지도 모르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 씨의 머리카락에서부터 짙은 태양의 향이 났다. 그 향이 좋아서, 그리운 향이 나다 보니 나는 무심결에 신 씨에게 물었다.

 

신 씨. 저 평생 책임져준다는 말기억해요?”

-? 기억하지! ? 하트에게 오려구?”

아뇨. 그냥 물어봤어요.”

?”

 

신 씨는 내게 훅 다가오더니 취해도 맑은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다 그대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어서 놀랐다. 내가 신 씨를 부르는데 대답이 없다. 자는 걸까? 자면 눕혀서 재우려고 손을 올리는데 갑자기 신 씨가 나를 꽉 안았다.

 

역시 안 되겠어. 나 만전일 때 정말 제대로 책임져줄게.”

 

라고 낮게 속삭이고는 신 씨는 내 어깨에서 스르르 내려와 침대에 쓰러졌다. 곧바로 잠든 거다. 신 씨야 이대로 자는 거겠지만, 나는 덕분인지 때문인지 가슴이 쿵쾅거려서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내 심장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신 씨의 주사(酒邪). 텐션이 너무 높아져서 이렇게 되는 거라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이 피곤해져서 기절하는 것만 같을 때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목소리가 잠겼을 거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신 씨와 눈을 마주쳤다. 신 씨의 행동이나 눈빛을 보니 평소의 신 씨다. 나는 신 씨에게 잘 잤냐고 물었는데 역시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신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 씨에게 아침 식사를 권유하고 준비하면서 어젯밤을 돌이켜봤다. 신 씨는 어제를 기억하실까? 그럴 리가 없겠지. 나조차도 어제 기억이 끊겼을 거라고 예상했는걸. 왠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신 씨가 씻는 동안 아침을 간단하게 준비했다.

 

미유쨩. 혹시 어제 내가 뭐 하진 않았어?”

? 왜요?”

그게, 기억이 안 나서. 혹시나 하트 사고 쳤을까 싶어서~ 만약 있다면 사과하려구.”

그대로 쭉 텐션 유지하다가 잠드셨어요.”

 

어제 신 씨답지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질투했다던가, 어떤 의미로든 책임져 줄 뻔했다던가, 그런 건 전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저 내 기억 속 자그마한 열기로 남겨두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로케를 끝내고 일주일의 휴가를 받았다. 신 씨도 때마침 휴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 씨도 술을 그렇게 마신 거라고. 오늘도 자기는 완전 여유롭다고. “오늘도 단둘이 휴일이네?”라는 신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침도 먹었겠다, 신 씨에게 이제 돌아갈 것이냐 물었다. 신 씨는 날씨도 더우니 단둘이서 집에 있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제안으로 내게 돌아왔다. 나는 좋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어제 잘 마신 거까지는 좋았으나, 약간의 숙취가 남아 힘든 것도 있다고 신 씨는 덧붙였다. 게다가 여름이라 나가면 딱 수육 꼴이 날 것이라 더 싫다고. 나는 집에 있어 봐야 할 거 없다고 말하자, 신 씨는 미유쨩이랑 있으면 뭐든 재밌지.”라고 답해주었다. 참고로 맛있는 세 끼까지 보장되어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는 말도 더하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누군가와 오래도록 공유한 것은 언제였더라. 그것이 행복하다 느낀 건 또 얼마나 오래돼 버린 과거일까. 이젠 바래버리고 미화되거나, 미화되지도 못한 채 떠도는 과거들. 그로부터 시작된 무언가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란 사람 자체도 원래 불안했고, 기질적으로도 그리 안정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그 때문인지 과거의 사랑들은 전부 뼈아플 정도로 실패했다. 원래 한두 번 실패하면 재수가 없겠거니 하지만, 그것도 반복되면 원인은 나로부터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내가 문제였던 걸까. 이젠 너무도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하게 됐지만. 내가 모자라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뭔가 지나쳐서, 내가 너무 신경 써서. 모든 걸 나로부터 비롯된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편했다. 사실 오히려 더 곪아가고 있었는데도.

소중하니까. 사랑할 때마다 내 마음은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사랑이란 건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라, 항상 최고의 결과를 내주진 않았다. 언제부터 내 사랑은 최악, 차악(次惡), 부정적인 결과들만 낳게 되었을까. 몇 번을 돌이켜봐도 모르겠고, 역으로 반추할 때마다 최선이라는 결과가 있었는가. 도리어 의문이 들었다.

그로부터 내가 배운 건 사랑이란 건 참 부질없는 것이라는 거였다. 소중하게 여겨봤자 한순간일 뿐이고, 그조차도 아름답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와는 어울리지도 않게 나는 지금 신 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이 좋아하는 마음이 언제 사랑하는 마음으로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는 건 분명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싫었다. 나는 구태여 부질없는 짓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고, 헛된 꿈은 이제 품고 싶지 않았다.

회사원 시절만 해도. 예전 애인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고내가 미화를 끝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게 많은 걸 알려주고 내어주었다.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에게 계속 눈치를 빙자한 강요가 있었고, 때로는 반응조차 잔인했다. 그만둔 것 중에는 아마도 그 사람 때문에 그런 것도 몇 개 있었지. 언제부턴가 그 사람은 내 세계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집착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계는 그로 잠식당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종국엔 생각마저 잠식당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즈음엔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종종 이미 없는 그를 생각하며 내 반응을 대조한다. 허상을 붙잡아 나 자신에게 윽박지르고 있다. 나는 아직도 과거에 붙잡혀 있었다. 스스로 괴롭고 이겨내야 할 부분임을 알면서도 쉽사리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하나 결심한다.

나는 사랑이란 감정을 잊기로. 겨우 생각을 되찾고, 겨우 나락에서 빛으로 기어 나와 지금까지 와서, 나는 결심했다. 사랑하는 감정을 잊자고. 그런 거, 있어 봐야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될 뿐이고, 안 그래도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는 나로서는 어쩔 도리도 없게 될 거라고. 사랑이 달콤하다느니 하는 로맨스 영화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사랑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닌 여유롭고, 언제나 활발하고 그런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인걸. 사랑은 나와 반대되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걸 나는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하나 뼈저리게 알았다. 나 같은 사람들은 지구상의 누구도 좋아해 주지 않을 거란 것을. 실패만 하고, 부담만 줄 뿐인 나는 누구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아프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좋다. 처음은 속여야 하니까. 사랑은 속임수도 몇 있는 법이다. 내가 진심일지라도 상대방은 아니라면, 상대방은 반드시 나를 속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삐걱거려 지금 이상으로 관계를 진전시킬 수 없다. 언제나 바보같이 순진했던 나는 항상 상대에게 진심이었다. 나는 상대의 속임수 같은 걸 잘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어버렸다. 상대에게 모든 걸 내어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난 그렇게 배웠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도 더 잔인했다. 사랑이 안 이루어지는 거만이 최악은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해줬다. 차라리 더는 밑으로 떨어지는 일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속임수가 없어도 진심이었던 쪽은 상대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로부터 조종당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그를 위해서, 그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가 싫어할 테니까. 온갖 이유에 는 없었다. 오로지 만 있었고 내 생각이라는 게 없었다. 그것이 그와 있으면서 내가 얻은 것이자 잃은 것이었다.

나는 나를 잃었다. 본디 소극적인 성격이긴 해도 이 정도였다고는 스스로 생각지 않았다. 원래 내 의지대로 하는 일이 잘 없었긴 했다. 그래서 사회에 갓 나왔을 땐 이리저리 실패하기 일쑤였고, 그것이 일이든 관계든 곧잘 넘어졌다. 거기에다 사랑의 실패가 내 성격이 더 어두워지는 데에 가속을 밟아준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한다. 사랑이란 이름 앞에 강요되고 잠식당한 세계. 스스로 사고(思考)하지 못하게 되는 말 그대로 인형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

만약 사랑이 이런 거라면 두 번 다시는 하기 싫다. 물론 신 씨가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미 겁먹고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나로서는 신 씨 곁에 있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자꾸 의문이 들었다. 나 같은 게. 이런 문장이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끝없는 자기학대를 하다 종국엔 허상의 신 씨에게 사과하고 있는 내 상태를 볼 때마다 나는 괴로웠다. 이건 절대 신 씨의 잘못이 아니다. 오롯이 내 잘못이고, 그렇기에 더욱 괴로웠다. 나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는데, 이겨낼 방법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으니까.

 

미유쨩~”

, , ?”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심오한 표정하고 있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신 씨의 부름에 나는 깊은 생각에서 나올 수 있었다. 신 씨는 침대에서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물었다. 나는 별거 아니었다고 둘러댔다.

 

. 별거 아녔어요. 근데 집에만 있으면 진짜로 할 거 없는데.”

영화 볼래? 요즘 TV로도 영화 볼 수 있잖아. 그럼 시간 금방 갈 거 같은데~?”

신 씨 관심 있는 영화라도 있으세요?”

 

나는 TV 리모컨을 건네주며 물었다. 신 씨는 요즘 영화 뭐 유명한지 잘 모르겠다고, 대신 카나데쨩에게 종종 추천작을 물었다고 한다. 영화 고르는 눈이 없다 보니 뭐가 좋은지 잘 몰라서 자문(諮問)했다나. 카나데쨩은 영화를 좋아해서 상영작부터 고전까지 곧잘 보고는 한다고. 그래서 이번에 무슨 영화를 추천받았냐고 물었는데, “이터널 선샤인!”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재밌다고 같이 보자는 신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맨틱 코미디는 사실 잘 모르겠는데. 그러나 이터널 선샤인은 마냥 웃기기만 하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을 많이 하게 해 주는 영화였다. 나도 예전 사랑들을 모두 잊을 수 있다면 좋았을까. 신 씨는 다 보고 나서 괜찮았다고 평했다. “역시 카나데쨩이네~ 다음에 또 물어봐야지.”라고 덧붙였다. 나도 괜찮았다고 답했다.

 

영화도 다 봤고 이제 빈둥거리기나 할까~”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거예요?”

, 미유쨩이랑 있으면 뭐든 재밌는걸.”

 

신 씨의 활기차고 올곧은 말에 나는 가슴속부터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름이 정말 오려나 싶었다.

 

 

*

 

 

신 씨가 빗길에 뛰쳐나간 다음 날.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하늘은 흐렸다. 이제 우산이 상시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이 되었다. 긴 장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사무소에 왔더니 신 씨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내가 일순간 당황한 것과 다르게 신 씨는 평소와 같이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했다.

 

미유쨩! 어제 비 많이 왔는데 잘 들어갔어?”

, . 그러고 보니 신 씨 우산 제가 갖고 있어요. 찾아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맞다. 오늘 찾으러 가면 돼? 괜찮아?”

, 괜찮아요.”

 

신 씨는 벌써 어제의 일을 툴툴 털어버린 걸까? 아니면 기분파이신 평소의 태도 때문에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당황한 티를 내면 오히려 이상할 테니 나도 평소의 나로 있으려 했다.

우산 오늘 찾으러 오면, 신 씨는 오늘도 우리 집에 오는 걸까. 아니지. 내가 갖고 내려와서 건네줄 수도 있는 거고. 왜 이런 거까지 고민하는 거야.

스케줄을 모두 끝내고, 신 씨랑 다시 같은 발걸음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신 씨는 우산이 또 있었는지 이번에는 장밋빛 작은 우산이었다. 그런데 우산이 있으면 나중에 받아도 되지 않나? 어떤 거든 내겐 나쁘진 않았지만.

사실 조금 불편해. 어제 그렇게 뛰어나가서 아무렇지 않은 건 좋다면 좋은 거지만 한 편으로는 나에 대한 신 씨의 마음을 알아버렸다. 게다가 상대가 냅다 뛰쳐나가는 일도 일어났으니. 정말 장마가 끝날 때 다시 물어오시려나. 그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그러면 그걸로 만족? 그렇다면.

신 씨는 가는 길에 이런저런 대화를 많이 걸었다. 장마가 길 거라느니, 레인부츠 산 값을 제대로 한다느니. 나도 받아치며 고향과 수국 얘기를 했다. 신 씨는 내게 수국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좋아하냐, 싫어하냐 둘 중 하나 고르라면 좋아하는 쪽인 거 같아요. 예쁘잖아요. 색마다 꽃말이 다른 것도, 까다로운 것도. 다 마음에 드는 거 같아요.”

그렇구나~ 그럼 하트는 무슨 색 수국 같아? 이거 꼭 말해줘야 해! 말해보라고~”

 

신 씨는 내 어깨를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툭툭 치면서 대답을 요구했다. 나는 생각을 하다 번뜩,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답했다.

 

. 보라색 수국?”

, 의외네! 분홍색이라 할 줄 알았거든! 이유는?”

분홍색도 잘 어울리긴 하는데. 왠지 제 생각에 신 씨는 보라색이 더 잘 어울리세요.”

 

왜인지 딱 보라색 수국이 떠올랐다. 분홍색도 어울리긴 하지만, 활동 중의 이미지 쪽 색깔보다 보라색이 먼저 떠올랐다. 꽃말에 따라 나온 거지만. 그것은 부끄러워 차마 본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분홍빛 수국의 꽃말은 처녀의 꿈이고, 보랏빛 수국의 꽃말은 진심이다.

신 씨는 나의 이유에 대해 별말 없이 수긍했다. 미유쨩이 보는 나는 보라색 수국이구나. 나는 그 말에 웃음으로 답했다. 신 씨는 비도 오니 가는 길에 술을 사 가자고 말했다. 나는 좋다고 답했다.

그날 나는 술에 거나하게 취했다. , 새삼스러울 게 없기는 하다. 늘 그랬고, 딱히 이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집에서 마셨기에 데려다주는 이벤트가 없다는 점. 그런 점이 좀 다른 것일까. 그런 것치고 요즘은 집에서 마시는 일이 많았으니 따지고 보면 그다지 다를 게 없을지도. 나는 이번에도 울었던가. 신 씨가 나는 술에 취하면 울보가 된댔다. 아마 또 만취해서 울었을 거다. 뭐라고 말하면서 울었을까. 그것조차 이미 필름이 끊겨 있었다.

그날 나는 꿈을 꾸었다. 평소에는 꿈을 잘 꾸지 않았는데. 비가 무척이나 많이 내렸다.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었고, 몇 개는 살아 있었지만, 대체로 시들어 있었다.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비가 너무 세차게 내려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장마라기보다는 소나기, 소나기보단 태풍 때에나 내릴 법한 비였다. 사실 그쯤 되면 비가 내린다고 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물을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나는 그 장소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발밑에 시들어버린 꽃들을 보았다. 여긴 어디고 나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그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 그러자 비는 그치고 꽃들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들고 생기가 없던 꽃들은 활기찬 해바라기로 바뀌었다. 해바라기는 일제히 한 방향을 보았다. 그 방향은 내 손목을 잡은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 사람을 향해 햇빛은 밝게 떨어졌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다. 내 손에 들려있던 우산은 어느샌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 이끌려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꽃밭에 풀썩 쓰러졌다. 향기로운 꽃냄새, 여름의 공기 내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리운 향, 태양의 향, 그 아이의 향이 났다. . 그 사람이 나를 꽉 안았다. 그리고 나를 불렀다.

 

미유쨩!”

 

신 씨였다.

그리고 눈이 떠졌다. 눈을 뜨니 집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 씨는 집에 돌아간 것일까. 자고 가도 되었는데. 나는 부스스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시고 현관에 가보았다. 우산은 잘 들고 갔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현관에서 결과를 확인하고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신 씨는 우산을 들고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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