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수탱이 체리」 줄여서 재수체리. 대학 입시라도 재수하는 불운한 체리 같아 보이기도 했으나, 여기서는 재수 없는 체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잠깐 숨을 돌릴 차 확인한 핸드폰에는, 정갈하게 6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저장한 이름대로 그는 재수탱이 밥맛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런데도 끊어내지 못하는 나도 한 멍청함을 자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뿐하게 메시지를 무시하지 못하고 확인하는 것부터가 그 증거다. ‘오늘 일찍 끝나면 만날까? 나 이번 활동이 방금 끝났어~’ 어쭈. 내가 뭐 자기 스케줄 비면 쫄래쫄래 이거 보고 기어나갈 줄 아나 보지. 나는 항상 바쁘거든. 예전에 내가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만나주는 시절에 멈춰 있는 건지, 재수체리는 자기가 만나자고 하면 언제나 내가 만나줄 거라는 생각이..
× “경류. 그거 알아? 계절마다 매력이 있다는 거?” “갑자기…?” 백주는 또 한 번 여행을 다녀오고 돌아와서는 그렇게 내게 말했다. 항상 모험을 다녀온 뒤 가장 먼저 나를 찾는 그녀였다. 이번에도 그녀가 무사히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뒤 술자리에서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계절의 매력이라니. 잘 모르겠는데. 그냥 날이 가고 오는 거지, 거기에 무슨 매력이 있다는 건지. 하지만 백주는 나와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나는 단순하다면 단순하게 검 말고는 다른 생각을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나에게 백주의 이야기는 정말 재밌는 이야기였다. 나에게 전혀 몰랐던 세계를 알려주기 때문에. 백주가 이번에는 계절 이야기로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자신이 다녀온 행성은 항상 봄인 행성이었다고 한..
1. * 비가 정말 거셌다. 호우주의보가 내려왔던가. 기상캐스터가 걱정스러운 말로 오늘의 날씨를 전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가 어떤 곳은 침수가 우려된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내 고향은 괜찮을까. 한창 수국이 예쁠 계절. 그리고 지금처럼 비가 거세게 내려 곤란하게 될지도 모를 계절. 그런 날에는 사무소나 집, 어쨌건 실내에 있는 게 좋겠지. 아마 어린아이들 중에 누군가는 천둥이나 번개가 무섭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거고, 누군가는 책상 밑으로 더 숨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그런 창밖을 멍하니 보면서 안 그래도 많은 생각을 더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어디에 속하냐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밖에서 걷고 있었으니까. 푸름이 드문드문 포진한 공원. 거기서 세찬 비를 우산으로 막고..
1. * “괜찮아?” 그때 나는 확실히 느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을 말하는 거라고. 바다처럼 푸른 머리칼과는 대조적인 그의 난색(暖色)의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엔 강인함과 온기, 그 너머 어떤 복합적인 것까지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서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나름 박학다식하다고 자부한 나였다. 그 어떤 거도 내 손에 들어오면 금방 감정(鑑定)할 수 있었고, 가치를 정립하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머리로도 이 감정의 이름은 쉬이 정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나는 절대로 이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걸. “아, 응. 괜찮아. 고마워….” 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의 손은 처음 잡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