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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류. 그거 알아? 계절마다 매력이 있다는 거?”

갑자기?”

 

백주는 또 한 번 여행을 다녀오고 돌아와서는 그렇게 내게 말했다. 항상 모험을 다녀온 뒤 가장 먼저 나를 찾는 그녀였다. 이번에도 그녀가 무사히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뒤 술자리에서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계절의 매력이라니. 잘 모르겠는데. 그냥 날이 가고 오는 거지, 거기에 무슨 매력이 있다는 건지. 하지만 백주는 나와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나는 단순하다면 단순하게 검 말고는 다른 생각을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나에게 백주의 이야기는 정말 재밌는 이야기였다. 나에게 전혀 몰랐던 세계를 알려주기 때문에.

백주가 이번에는 계절 이야기로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자신이 다녀온 행성은 항상 봄인 행성이었다고 한다. 항상 봄이면 좋았으려나. 나는 깊게 생각지 않고 좋았겠네.”하고 답했더니, 백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봄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계절 같았어. 그 행성은 연중 다 봄이었어. 늘 꽃이 만발하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지. 그런데 행복한데도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많더라. 나는 그때 깨달았어. 가장 화려한 모습일수록 가장 잔인한 면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럼 장단점이 다 있는 거네.”

맞아. 바로 그게 계절의 모습들인 거야. 봄은 사람들이 으레 꽃이 피고 햇살이 따사로워지는 때니까 좋다고만 생각하잖아. 근데 막상 뜯어보면 꽃 피는 날에 그렇게도 사람들은 죽고 싶어 했어. 그 행성은 항상 봄인데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행성이었지.”

그럼 백주는 봄이 싫어?”

 

내가 그렇게 묻자, 백주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자기는 봄이 좋은 편에 속하는 거 같다고.

 

그렇진 않아. 난 평범한 사람들과 입장이 같거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 응성과 단풍, 경원, 그리고 경류 너와 술 마시는 그때가 좋아. 푸름이 물들어 오는 그때가 좋아. 나도 아직은 봄이 좋은가 봐.”

 

백주는 그러면서 여름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술자리 얘기의 대부분이 계절로 정해진 듯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백주가 하는 얘기니까. 나는 그녀가 하는 얘기라면 그 어떤 얘기도 재밌었다. 그녀라서 용인되는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 이유를 본인조차도 모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거 같다.

여름은 녹음들이 우거지는 모습이 좋아. 햇살도 쨍하고, 하늘의 구름도 예쁘고. 그 여름만의 색감이 정말 그 어떤 계절들과 견줄 수가 없지. 백주는 그렇게 말했다. 여름은 덥고 습해서 짜증나기만 하는데? 내가 그렇게 투덜대자 백주는 웃었다. 너는 모르지.

 

뭐를 몰라.”

너는 모르지, 경류. 여름이 좋은 이유.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방울이 좋아서 좋아해.”

땀이 좋다니. 완전 이상한데, 술 취했나?”

안 취했어~ 그게 좋은 이유는. 아니다, 말 안 할래. 네가 언젠가 알아내 봐. 내기야.”

? 그건 억지잖아.”

 

돌연 내게 멋대로 내기를 통보하는 백주. 나는 황당해서 반문을 던졌지만, 백주는 제멋대로 내기를 걸자고 말했다. 자신이 왜 여름을 좋아하는지 이유를 알아내는 것. 만약 내가 알아내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고, 반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면 자신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것. 막무가내의 내기였지만 한 편으로는 이기고 싶단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알아낼 수 있을지 장담하지도 못하면서 그 내기를 승낙했다. 백주는 나의 승낙에 싱긋 웃었다.

 

그렇게 너도 계절의 매력을 알았으면 좋겠어. 그래, 곧 겨울이네. 나는 겨울을 좋아해. 달이 가장 잘 보이거든.”

 

겨울을 좋아한다며 나를 보는 백주. 그 눈빛이 왜 그리 신경 쓰이는 걸까. 백주는 달을 좋아하는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를 보다가 웃으면서. 왜 달 얘기를 하는데 지금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아니고 나를 보고 얘기하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달이 잘 보이는 겨울이 좋아. 달은 늘 밤하늘을 밝혀주잖아. 나는 여행할 때 달을 보고 길을 걷곤 해.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거 같거든. 항상 그리운 무언가를 떠오르게 해. 그래서 빨리 여행을 갔다 오고 싶은 걸지도. 그 그리운 게 뭔지 알아야 하니까.”

오늘 백주 얘기 많이 어려워. 나로서는 따라가기 힘들어.”

그래? 계절 얘기일 뿐인데?”

계절 얘기일 뿐인데. 그런데도 어려워. 게다가 내기도 걸었잖아.”

 

그렇게 내가 투덜대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싫지는 않았다. 백주는 늘 그렇게 약간은 제멋대로였고,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한편 생각했다. 백주가 좋아하는 달과 내가 보는 달은 분명 같은 달일 텐데 어디서 그런 다름을 느끼는지.

나는 백주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싶었다. 같은 것도 다르게 바라보는 것 또한 매력적인 일이겠지만, 나는 백주가 바라보는 세계가 늘 궁금했다. 다른 것엔 무관심했던 내가. 나는 백주의 세계가 늘 궁금했다. 내가 거기에 속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표현할 줄 모르고 방법을 알지 못하는 내가 그런 걸 바라고 마는 것이다.

 

 

 

경류, 있지. 나는 봄을 좋아해. 벚꽃이 흐드러지게 눈처럼 스러지는 풍경을 보면 설레지 않아? 나는 조금 설레게 돼. 네가 그 벚꽃눈 속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뭔가 설레더라.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는 사이사이에 네가 스며들어 있는 풍경이 나는 좋아. 그래서 나는 봄을 좋아해.

나는 여름도 좋아해. 여름에는 네가 검술을 전수하면서, 연마하면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는 모습이 너무 멋진 거야. 너는 덥고 습해서 싫다고 하겠지만 말이야? 너는 보이는 것보다 좀 단순한 면이 있거든. 어쩌면 나한테만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나는 그런 네 모습이 좋아서 여름이 좋아졌어. 잎새 사이로 깨져 오는 빛을 받는 네 모습이 너무 찬연해서. 찬란해서 눈부셔서. 그래서 나는 빛나는 여름이 좋아졌어.

나는 가을도 좋다?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네가 좋아서. 추워지는 날에 네 생각이 나서. 무엇보다도 하늘이 높아지면서 구름이 사라지고 하늘이 청명해서. 그 푸름이 너를 닮은 거 같아서. 맑은 하늘에 뜬 달이 너무나도 너 같아서. 별이 촘촘한 그 하늘 속의 푸른 달이 너 같아서. 나는 그래서 가을이 좋아졌어.

나는 겨울이 좋아. 특히 겨울이 좋아. 그 서늘한 한기. 이르게 뜨는 달. 아침에 뜨는 달도, 저녁에 뜨는 달도, 심야에 뜨는 달도 다 너를 떠올리게 해. 맑지만 차가운 달. 나는 특히 아침에 잔존(殘存)한 달을 좋아해. 어스름이 옅어지는 아침, 그 시간에 떠 있는 달이 널 떠올리게 해. 그 옅은 푸름 속에 있는 달이 너 같아서. 나는 그래서 겨울을 정말 정말 좋아해. 겨울이야말로 경류 너를 상징하는 계절 같으니까. 나는 겨울을 제일 좋아해. 너는 이게 어떤 뜻인지 알까.

나는 여행할 때마다 밤에 달을 올려다봐. 달이 길을 알려주는 것도 있지만, 항상 네가 그리워서. 여행길을 오르면 그 어떤 것보다 간혹 네가 짙게 그리워져. 그래서 나는 늘 달을 올려다봐. 왜냐면 너랑 가장 닮은 게 달이니까. 그래서 나는 제일 좋아하는 게 달이 된 거 같아. 네가 정말 좋으니까.

나는 그렇게 사계가 좋아졌어. 모든 계절에 경류 네가 있었으니까. 모든 계절의 화룡점정의 순간에는 항상 네가 존재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느샌가 모든 계절이 좋아졌어. 싫어하는 점마저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어쩌면 그건 내가 너를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모든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 그렇게 만든 존재 또한 똑같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너도 동의할 거지?

항상 여행을 끝내고 오면 길고 멀었던 여정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나는 종종 생각해. 나는 그때마다 여러 가지를 떠올리지만, 역시 너에게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지 고민하는 내 모습이 있더라고. 참 이상하지. 그게 제일 생각하는 거라니.

있잖아, 경류. 나는 너 또한 내가 느끼는 계절의 매력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물론 같은 것도 다르게 보는 그런 차이도 매력적인 관점이지만, 나는 네가 나와 같은 관점으로 바라봤으면 싶기도 해. 그중 제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길 바라는 게 바로 계절이지. 너도 계절 자체의 매력을 넘어, 계절의 모든 순간에 무언가가 있길 바라. 그건 정말 색다른 경험이니까. 이건 너무 내 욕심이려나.

 

역시 어려워.”

? 뭐가?”

백주 네가 내기로 건 내용 말이야.”

 

내기를 걸기로 한 뒤로 시간이 조금 흐른 날. 경류는 차를 마시다 찻잔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못 진지한 표정까지 지으며 고뇌하고 있었다. 그 모습까지도 제법 멋져 보인다면, 나 또한 어떤 것에 사로잡혀있을지도 모른다고 순간 생각했다.

 

여름이 좋은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지. 난 덥고 습하고. 여름에 검술 연마라도 하는 날엔 나라도 땀이 안 흐르려고 해도 흐를 수밖에 없는 계절인걸.”

여름은 특히 그런 이유로 좋아하는 거지만, 나는 모든 계절을 좋아해. 너도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나와 같은 세계를 보면 어떨까 싶어서 내기를 걸어 본 거야. 내가 계절을 좋아하고 나서부터는 정말 세상이 달라 보이거든.”

알았어. 꼭 알아낼 테니까. 내 소원 들어줄 준비나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경류에게 나는 싱글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계절을 알아간다면. 너도 언젠가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지?

그리고 너 또한 나를 좋아하겠지.

 

 

×

 

 

경류. 나에게 있어 달은 언제나 너였어.”

 

풍요의 주민들, 약왕의 비전들의 침공이 거셌다. 이 치열한 전쟁의 목적은 그 중에서도 찰나를 잡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전력으로도 열세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개개인이 아무리 세다 한들, 결국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전세라고. 그 와중에 우리 진영에서 사건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전황(戰況)은 최악이라고 해도 사실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 백주도 전쟁에 참여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마침내 단풍이 폭주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백주는 그걸 보더니, 어떤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의 나라면 분명 그 표정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오늘따라 왜 이리 불안할까. 우리가 전쟁 중이라서? 치열하게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백주가 뭘 할지 알 거 같아서. 그녀라면 뭘 할지 너무나 분명히 알 거 같아서. 그래서 무서워서. 어떤 두려움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어서. 어지간한 일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내가, 지금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어서. 결말을 명백히 알 거 같아서.

백주는 내게 달려와 급하게 한마디 남겼다.

 

경류. 나에게 있어 달은 언제나 너였어.”

?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급하니까 간단하게 얘기할게. 미안해. 언제나 내 모든 계절에는 네가 있었고, 너라는 달이 있어서 좋았어. 내가 여름을 좋아했던 이유야. 소원은나중에 들을게. 생각해 둬.”

백주. 잠시만. 백주, 백주. 기다려!”

 

그게 백주와의 마지막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을 잃을 때에서야 모든 답을 안다는 것은, 세상에 몇 없는 잔혹한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물며 열세의 전쟁 상황에서 그토록 찾던 답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그것도 결국 내가 가장 원하던 것들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난 뒤에야 얻는 기분은.

사실 처음에는 안 믿었다. 백주가 정말로 죽었을 리가 없다고. 나는 부정을 했다. 그야 백주는 운이 조금 사나울지언정 항상 위험한 순간에는 살아서 돌아오는 행운을 지녔고, 그렇게 돌아온 뒤에는 항상 나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전세는 열세였지만, 자신의 그 엄청난 운으로 해결하고 이 전쟁을 끝내보려는 거라고. 잠깐, 백주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하지만 계절을 보낼수록, 그 하나하나의 계절이 나를 스쳐 갈수록 점점 부정조차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계절을 알게 되었다. 백주가 없어진 후로 처음 맞이한 봄은 정말로 잔인했다.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눈처럼 내리는 그 풍경에 분명 있어야 할 백주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예전, 백주가 그 사이에 있던 때를 떠올렸다.

벚꽃눈 사이로 백주가 나를 보고 웃던 때.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나.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나. 유난히 나를 보고 웃어주던 백주를 떠올리자, 나는 그제야 내 감정을 깨닫고 말았다.

, 백주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어쩌면, 그것을 뛰어넘어 백주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봄날의 그 풍경을 보고 영원하길 바라고 말았던 그 순진한 마음이 사랑이었구나. 백주가 유난히 나를 보고 웃어주는 게 내 착각이 아니길, 정말 나만을 향한 것이길 바랐던 그때. 나는 아이처럼 백주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구나.

여름이 오면 나는 여름의 찬연함이 원망스러웠다. 백주는 나 때문에 이 덥고 습한 여름이 좋다고 했다. 내가 모든 계절에 스며들어 있기에, 그래서 사계가 좋다고 했었다. 나는 이 덥고 습한 여름 속에서 찬연함을 발견했다. 햇살 속 존재 사이로 깨져오는 찬란한 빛들이 예쁘다며 말했던 백주가 떠오른다. 나도 이제 그 빛을 보니 알 것 같다. 백주 네가 예쁘다며 말했던 그 빛들이 이제야 보인다. 네가 그 찬란한 사이사이의 빛들 속에서 예뻤던 게 이제야 생각났다. 너 또한 나를 보고 그렇게 느꼈을까. 이제는 어떻게 해도 알 길이 없어서. 네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어서.

함께 연못가를 거닐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 물 위에 깨져있는 윤슬을 보며 나는 무심코 바랐다. 나는 지금 보면 바랐던 게 참 많았던 사람 같다. 백주 너와 함께 있으면 모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와 윤슬을 바라보며 네 빛나는 모습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못가를 거닐며 덥다고 머리를 들어 올리며 앓던 네 모습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때의 네 모습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시리고 설렌다. 나는 정말로 너를 사랑했나 보다. 네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너를 향한 사랑을 점점 깨닫고 있다. 어쩌면 좋을까. 이제 내 마음에 대답해 줄 너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는데.

나는 네 덕분에 이제야 덥고 습한 여름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운 바람에 눈을 살포시 감으면 왜 네 모습이 떠오를까. 너는 여름 같은 사람이란 걸까. 여름처럼 뜨겁고, 열병을 앓을 온도처럼 사람을 미치게 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너는 내게 여름의 열병 같은 사람이다.

가을은 금목서의 향처럼 네 향이 무심코 떠오른다. 9월 말 10월 초를 기점으로 자아내는 금목서들의 향연들이 너를 떠오르게 한다. 그만큼 화려하고 기억에 짙게 남는 향을 지녔던 백주 너의 향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렇게 나는 가을을 맴도는 사람이 되었다. 그 향에 떠돌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옅은 구름 속 푸름이 무언가 그리운 걸 떠오르게 한다. 너와 관련된 이름 모를 무언가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나는 감히 이름을 명명 짓지 못한다. 그렇게 나는 가을 하늘과 향에 떠도는 방랑자가 된다.

그렇게 겨울이 되었을 때. 나는 부정하는 것조차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너는 겨울이 좋다고 했었다. 달이 가장 잘 보이는 계절이라면서, 너는 나를 보며 그렇게 얘기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그 달은 나였음을. 그렇게 너는 내게 사랑을 고했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처럼 굴었구나. 너는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제는 물을 수 없다. 나는 겨울을 맞이하고서 네가 죽었음을 인정했다.

시린 겨울바람 속, 그리운 향기가 여전히 불어온다. 그리고 그때 너를 떠올리려니 점점 흐려지는 기억들이 생겨남을 인지했다. 아니, 잊어가는 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는 기억들과 감정들이 괴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장 아픈 겨울에 당도하고서야 나는 인정했다. 네가 그렇게 가장 좋아한다던 겨울이 내게는 가장 아픈 계절이 되었다. 너의 죽음을 인정한 계절.

달을 올려다보며 너를 떠올리다가 문득 마음속에서 인정하기 시작했다. 백주 네가 죽었음을. 시린 바람 속에서 이제는 인정해야 함을 마음이 갑자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그럴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마음이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나는 그 상실감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 부정하며 외면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듯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상실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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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여러 일이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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